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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교재, 유사하지만 도용이 아닌 이유
두 권의 교재, 유사하지만 도용이 아닌 이유
<사진>
유아 미술 전문교육 교재 두 권이 있다. 두 교재는 내용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교육철학, 핵심 키워드 문구 등이 동일하다. 이 경우, 무단 도용에 해당할까? 해당 표현이 교재 제작업체의 독창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무단 도용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나왔다.
친구가 펼친 교재에서 느낀 기시감신윤아는 1년에 한 번 있는 유치원 교사 모임에서 같은 과 대학교 동기였던 김진형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는 둘도 없는 절친이었지만 유치원 교사가 되고 5년이 흐를 동안 명절에 한 번씩 잘 지내냐는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둘은 이렇게 보면 너무 좋은데 왜 이렇게 얼굴 보는 게 어렵냐며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신윤아는 학생들과 야외활동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고 김진형은 학부모 상담이 어렵다고 조언을 구했다. 다른 교사들은 서로의 교육법과 최근의 교육 자료와 정보를 공유하며 토론을 했다. 모임에서 가장 화두가 됐던 주제는 ‘교육용 서적’이었다. 신윤아는 마침 준비해 온 교재를 펼치며 다른 교사들에게 보여줬다.
“지난 학기에는 개인적으로 고민이 참 많았어요.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칠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는데, 이 교재가 괜찮더라고요.”
교재를 본 여러 교사들은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아는 척을 했다.
“그 교재 저도 알아요. 유아 미술교육 관련된 논문자료들을 참고해서 개발된 거 아닌가요? 저도 이번 학기 시작하기 전에 샀거든요.”
교사들은 신윤아의 교재를 돌아가며 살펴봤다. 교재는 마지막으로 김진형에게 전해졌다. 평소 유아 미술교육에 관해 특히 관심이 많은 김진형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신윤아의 교재를 꼼꼼하게 살펴봤다. 역시 교재는 훌륭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약간 기시감이 들었다. 김진형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윤아야. 그런데 내가 요즘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교재와 약간 비슷한 부분이 보이는 것 같다. 같은 분야니까 아무래도 유사한 내용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 한 번 보여줘.”
신윤아의 부탁에 김진형은 가방에서 교재를 꺼내 보였다. 교사들은 두 교재를 바닥에 놓고 꼼꼼하게 비교하며 보기 시작했다. 교사 2년 차에 접어드는 교사가 말했다.
“이건 정말 비슷한 것 같네요. 여기 보면 특정 소재를 선정해서 소재를 표현하거나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포도송이나 도넛, 공작새 같은 것들이요. 딱 봐도 소재들이 많이 겹치는 것 같네요.”
하지만 10년 차 베테랑 교사는 다른 의견을 말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소재를 선택하는 데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소재를 표현하는 구체적인 방식은 차이가 있어요. 그리고 저는 교사 생활 10년 하는 동안 이런저런 교재 봤는데 어느 정도는 비슷해요. 유아들에게 친숙한 소재를 정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소재 선택이나 표현 방식이 유사할 수밖에 없어요.”
모임은 신윤아와 김진형이 꺼낸 두 교재의 유사성이 무단 도용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마무리 됐다.

두 권의 교재, 유사하지만 도용이 아닌 이유
소송으로 번진 동일한 문구의 도용 여부신윤아와 김진형은 모임 이후 반년 만에 친구의 결혼식에서 다시 만났다. 둘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각자의 결혼 생활에 대한 푸념을 시작으로 결혼한 친구가 내일 신혼여행으로 떠난다는 발리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자연스럽게 저번 모임에서 화제가 됐던 교재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 맞다. 그때 내가 가져왔던 교재 있잖아. 그 교재 제작업체에서 진형이 네가 보여준 교재 제작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나봐.”
“정말? 좀 자세히 말해봐.”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교육철학과 교수법 그리고 ‘생각하는 관찰로 그림이 달라진다’는 핵심 키워드를 그대로 복제했다는 거야. 서적의 내용 가운데 총 37군데를 무단 도용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결과는?”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김진형은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신윤아를 바라봤다. 신윤아는 곧바로 말하지 않고 한동안 뜸을 들이다 말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기각.”
“정말?”
신윤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부연설명을 했다.
“그 업체가 교수법을 개발하며 내세운…. 즉, 생각하고 관찰해서 그린다는 개념은 이미 존재했었어. 뿐만 아니라 기존 유아 미술 프로그램 등에서 쉽게 도출할 수 있는 개념이었지. 때문에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로 볼 수 없다는 게 법원의 판결이야. 그때 우리가 말했듯이 소재의 표현을 위해 특정 활동을 요구하는 부분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야, 이미 다른 유아·아동용 미술 교재나 논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활동으로 기존에 알려진 교육 방식의 하나일 뿐이라는 판결이 났어.”
“그러니까 무단 도용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거네.”
“응. 적어도 법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비슷한 부분이 있긴 있으니까 애매하긴 한 것 같다.”
“내 생각엔 비슷한 부분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유아들에게 다가가는 방법과 형식이 언제나 새로워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교재의 내용보다 그것을 전하는 교사의 마음이 더 중요할 것 같아.”
“그건 그렇지.”
김진형은 혼란스러웠던 생각이 명쾌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온 김진형은 다섯 살 난 딸이 엄마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다가갔다.
“우리 연이, 오늘은 동물 친구들을 그리고 있구나.”
아내는 김진형에게 교재를 보여주며 말했다.
“여보, 당신이 지난주에 가져왔던 교재 두 권 말이야. 연이가 엄청 좋아했어.”
“그런데 거의 비슷하지 않아?”
“아니야. 약간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아이가 느끼는 건 다른 것 같아. 동물 그리는 건 비슷해 보여도 표현되는 방식이 다르더라고. 한 권이라도 없어지면 연이는 슬퍼할거야.”
두 권의 교재는 환하게 웃는 아내의 손과 연이의 손에 하나씩 들려 있었다.

이 이야기는 유아 미술 전문교육 교재의 교육철학, 교수법, 핵심 키워드 문구 등을 사실상 동일·유사하다고 주장한 손해배상소송에 대한 내용입니다.
[서울고등법원 2018. 7. 12. 선고 2018나2011891 판결]

법원은 원고가 개발했다는 교수법은 이미 존재하였거나 원고가 기존 유아 미술 프로그램 등으로부터 쉽게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이며, 원고가 피고가 무단으로 도용했다고 주장한 문구는 원고의 교수법을 반영한 독창적인 표현이라고 보기 어려워 무단 도용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습니다.

두 권의 교재, 유사하지만 도용이 아닌 이유

글 _ 정용준 소설가, 〈바벨〉,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가나〉 등 집필 그림 _ 이승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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