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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素月)의 경우
소월(素月)의 경우
김소월의 유일한 상속자였던 김정호 씨는 저작권에 따른 어떤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그런 세월이 있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지만 못내 서글픈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2006년, 김정호 씨는 세상을 떠났다.
상속인이 없어 소멸된 저작권1959년 6월 7일자 동아일보는 김소월(1902~1934)의 아들이 남한에 생존해 있다는 기사를 내보낸다. 소월은 고향이 평안북도로 생애 대부분을 이북에서 보냈고 33세에 고향 곽산에서 사망하였다. 슬하에 6남매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당시 스물여덟 살 난 셋째 아들이 서울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3남 김정호 씨는 소월이 세상을 등질 때 겨우 세 살이었다. 그는 6.25전쟁에 십대 나이로 참전했다가 반공포로가 되어 서울에 정주하게 되었다. 그는 매우 힘들게 생활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호 씨는 이북 출신의 전쟁포로로서 차마 소월의 자식이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고 지낸 것으로 보인다. 누이 둘과 형 둘, 그리고 유복자로 태어난 남동생은 모두 북에 살고 있었다.
신문기사는 ‘소월의 아들 정호 씨가 나타난 지금 상속인이 없는 까닭으로 해서 저작권이 소멸하여 수많은 출판사들에 의하여 20여 종이나 출판되고 있는 「소월시집」의 저작권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하는 질문으로 마무리된다. 문학계는 새천년을 맞아 ‘근대문학 100년’이라는 지층을 갖게 되고, 2001년부터 탄생 100년을 맞는 문인들을 기리는 문학제를 매년 열고 있다.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근대문학의 여명기에 활동한 작가들이 속속 100세에 이르며 재조명되고 있다. 올해는 문익환, 오장환, 한무숙 작가가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이런 문학제들은 유족들을 모시고 함께 하는데 정지용이나 이효석처럼 자녀들이 남아 선친의 문학을 기리는 일에 열성인 경우도 있고, 김유정이나 이상과 같이 유족을 남기지 못한 경우도 있다. 분단과 전쟁은 월북문인, 납북문인을 양산하여 탄생 100주년 문학제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노정한다. 북으로 간 작가들은 작품들이 오랫동안 판금으로 묶여 있다가 88올림픽을 맞아 해금되었다. 일찍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백석이 1996년까지 생존해 85세의 일기로 삼수의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백 년이 천 년이나 된 듯 문학사는 결락과 허방들로 숭숭하다.

소월의 문학제에서 만난 3남 김정호 씨소월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해는 2002년이었다. 당시 필자는 소월의 문학제를 준비하는 실무자로 참여했는데 유족을 찾는 과정에 앞서 동아일보 기사도 접하게 되었다.
3남이 기사에 등장한 후 40여 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아드님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김정호 씨의 근황을 간간이 전하는 언론보도가 없지 않았는데 그는 세인들의 짐작과는 달리 매우 불안정한 직업들을 전전하면서 1남 1녀의 가정을 꾸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결혼반지를 팔 정도로 막다른 지경에 몰리기도 했고, 아내가 큰 수술을 받게 되자 목돈을 마련하지 못해 9년간 근무한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수령해 치료했다.
그가 소월의 아들로 살아온 생의 중압감을 토로하는 대목에서는 애증의 심로도 읽혔다. 그렇지 않겠는가. 자연인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만 오롯한 게 아니라 그의 경우에는 명사의 아들로서 선친의 그림자를 밞고 살아야 하는 자의식과 죄책감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늘 주위의 관심에 짓눌려 지냈을 것이다. 그러니 시쳇말로 생활이 몰려도 주위에다가 하소연도 못했으리라 싶었다.
노년에 이른 그는 아들 가족과 함께 김포에서 지내고 있었다. 병환과 노구로 행사장에는 나올 형편이 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아들, 그러니까 소월의 손자가 문학제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월의 손자 김영돈 씨는 듬직하고 훌륭하게 장성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부심이 컸으며, 무엇보다 아버지의 삶에 드리운 할아버지의 그늘까지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소월은 생전에 실물사진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신문에 사진이 한 컷 남아 있으나 너무 흐릿하고, 김정호 씨도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바람에 선친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생전의 소월을 만나본 원로들이 손자의 얼굴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렸다고 증언하여 신문의 흐릿한 사진과 손자의 얼굴을 합쳐 소월의 초상화를 그렸다. 지금 시중에 널리 알려진 소월의 초상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런 내력들이 엮여서 김영돈 씨가 할아버지와 그의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을 담담히 진술할 때는 소월이 현신하여 세상에 벌거숭이로 두고 간 아들을 안쓰럽게 거둬들이는 것처럼 애잔하였다.

허무하게 사라진 저작권에 대한 안타까움소월은 생전에 「진달래꽃」(1925)을 냈고, 그의 사후에 스승인 김억이 「소월시초(素月詩抄)」(1939)를 엮어냈다. 소월만큼 여러 판본의 시집이 출간되고 또 많은 시들이 애송되는 시인도 흔치 않다. 1959년 동아일보 기사도 20여 종의 시집이 유통되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소장자료를 참고하면 소월의 시집 단행본은 「진달래꽃」, 「소월시집」, 「한국의 명시」 등의 이름으로 430종이 발간되어 있다.
2011년 이후에만도 129종의 시집이 출간되었다. 매년 16종씩 발행되고 있는 수치다. 음반, 낭송 등 멀티미디어 자료도 394종에 이르는데 「개여울」,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산유화」, 「진달래꽃」 등 널리 애창되는 노래만으로도 소월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은 식지 않고 있다.
소월의 저작권 만료 시점은 1984년이었다. 그 시기는 실향민인 김정호 씨가 어렵사리 가정을 꾸려 서울살이에 안간힘을 쓰던 시간들과 겹친다. 소월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김정호 씨는 저작권에 따른 어떤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그런 세월이 있었다. 그렇게밖에 말할 길이 없지만 못내 서글픈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3남 김정호 씨는 김소월 탄생 100주년으로부터 4년 후인 2006년 세상을 떠났다.

글 _ 전성태 소설가,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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