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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
한 줄의 문구도 저작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문장이 비교적 짧더라도 저작자의 개성이 반영되어 있다면 창작성이 인정돼 어문저작물로 보호받을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건배!”
밴드 무무의 음반 발매 기념으로 모인 술자리. 무무의 리더 윤준기는 멤버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쳤다. 흥겹고 시끄러운 술집에 무무의 노래가 울려 퍼지자 윤준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반에 적힌 문구가 새삼스럽게 마음을 울렸다. ‘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윤준기는 자신이 쓴 문구를 조용히 읽었다. 사라져가는 청춘을 아쉬워하며 만든 무무의 음반 테마이자 제목이었다. 술집에서 노래를 들은 이들이 하나 둘 노래의 후렴 부분을 따라 부르며 함께 기뻐했다. 무무는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길 바라며 멤버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술잔을 비웠다.

10년 후 달라진 상황백화점 지하 2층 어느 마카롱 카페 벽면에 부착된 네온사인 문구를 충격적인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며 윤준기는 과거를 회상하며 중얼거렸다.
“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무무의 음반 제목과 토시 하나 다르지 않았다. 카페 손님들은 술에 취한 윤준기를 곁눈질로 흘겨보며 네온사인 앞에서 사진을 찍어댔다. 윤준기가 비틀대며 걷자 곁에서 그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본 무무의 기타리스트 강준영이 윤준기를 부축하며 말했다.
“속만 상하게 여긴 뭐하러 왔어. 일단 소송 제기했으니까 기다려보자.”
그 순간 감정이 복받친 윤준기가 카페로 돌진해 네온사인에 주먹을 뻗었다. 번쩍! 하고 스파크가 터지며 카페에 조명이 꺼졌다. 윤준기는 감전된 듯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

저작권의 힘이 강해진 새로운 세상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복도 끝에서 경찰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윤준기는 고개를 떨군채 경찰들이 자신을 잡아갈 것을 예상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경찰은 윤준기를 지나쳐 한 음반가게로 들어갔다. 경찰들은 저작자를 표시하지 않은 채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바라본 뒤 카페 주인의 팔을 잡고 체포하며 말했다.
“저작권법 위반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윤준기를 일으키며 강준영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만든 문구를 허락도 없이 그대로 쓰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손님들은 경찰에게 잡혀가는 카페 주인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윤준기는 처음 보는 광경에 깜짝 놀라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경찰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강준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답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저작권법 위반은 강력 범죄잖아. 남의 것을 무단으로 쓰는 건 엄연히 도둑질이라고.”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확실히 이전의 세상과는 달랐다. 상점마다 걸어 놓은 모든 광고 문구 하단에는 저작자가 큼지막하게 표기돼 있었던 것이다. ‘저작권법 위반이 강력 범죄라니….’ 윤준기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맞다. 그럼 내 음반은 어떻게 되는 거야?”
윤준기는 문득 음반 문구가 무단으로 도용된 사건이 떠올라 강준영에게 물었다. 그러자 강준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 백화점 영업 정지 한 달 째잖아. 허락도 없이 우리 음반의 문구를 무단으로 사용하다니!” 윤준기는 강준영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한달음에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백화점 건물 외벽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창작물을 무단 이용해 저작권법 위반으로 한 달간 문을 닫게 됐습니다.’
재판도 빠르게 열렸다.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예측한 대로 윤준기가 쓴 음반의 문구는 창작물로 인정돼 백화점은 수천만 원의 손해배상 제재를 받게 됐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리자, 윤준기는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세상에선 저작권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창작물로 인정되지 않거나 무단 도용해도 소송을 해서 이겨야만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었다. 윤준기가 우연히 들어선 또 다른 세상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복잡한 생각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백화점 근처 소각장에서 버려진 네온사인을 발견했다. 10년 만에 마주한 윤준기의 청춘이자, 가장 애틋한 음반 문구. 윤준기는 안타까운 마음에 네온사인에 손을 뻗었다. 순간 번쩍! 하며 스파크가 튀었고 윤준기는 정신을 잃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

다시 마주하게 된 저작권의 현실눈을 떠보니 강준영이 윤준기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옥외 광고엔 온갖 카피 문구가 저작권 표기 없이 쓰여 있었다. 윤준기는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강준영은 재판 당일에 갑자기 사라지면 어쩌냐며 급히 윤준기를 차에 태웠다. 윤준기는 강준영에게 꿈속에서 만난 ‘또 다른 세상’에 대해 말했다. 강준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진짜 꿈같은 세상이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너무 기대하지는 마.”
윤준기는 법정에 도착해 초조한 마음으로 판결을 기다렸다. 판사는 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사건 저작물은 원고가 발매한 음반의 겉면에 스티커로 부착된 것으로서 ‘우리 조금 불안하더라도 인생에서 다시 없을 청년 시절을 충분히 만끽하고 즐기자’라는 사상이 표현되었다 할 것이고 용어의 선택, 리듬감, 음절의 길이, 문장의 형태 등에 비추어 독창적인 표현 형식이 포함되었다고 할 것이므로 창작성이 인정된다.”
판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피고가 원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상품 판매 공간에서 저작물을 네온사인 게시물 형태로 제작하여 사용하고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에도 게재한 것은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기 때문에 원고에게 손해배상금 300만 원을 지급하라.”
법정을 나오는 윤준기의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음반을 만들기 위해 밤잠을 설치고 애를 썼던 무수한 날들과 한 문장 한 문장 가사와 좋은 문구를 고민하던 시간들.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그야말로 청춘을 다 바쳤던 자신의 열정이 힘없이 꺼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윤준기는 서러운 마음이 복받쳐
올라 헛기침을 했다. 그 순간 윤준기는 뭔가를 보고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신호등 맞은 편 카페 입구에 똑같은 문구가 적힌 네온사인에 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음반에 적힌 문구를 그대로 네온사인으로 제작해 백화점 상품 판매 공간에 걸어둔 경우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8. 9. 4. 선고 2017가소7712215 판결]

법원은 원고가 발매한 음반의 겉면에 스티커로 부착한 어문저작물에 원고의 사상이 표현되었고, 독창적인 표현 형식이 포함되었으므로 저작물로서의 창작성을 갖춘 것이라 판시했습니다. 따라서 피고가 원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원고의 저작물을 네온사인 게시물 형태로 제작하여 사용한 것은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시했습니다.

글 _ 정용준 소설가, 〈바벨〉,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가나〉 등 집필 그림 _ 이승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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