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단상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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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꼴, 프로그램과 창작성
글꼴, 프로그램과 창작성

글꼴 창작자의 권리 보호에 대한 부정적 시선오랜 기간 실무를 처리하고 경험을 쌓았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렵고도 흥미롭게 느껴진다. 글꼴 창작자의 권리 보호에 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학설과 여론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흔한 명조체나 고딕체와 별 차이 없는 글꼴임에도 무단 사용을 빌미로 형사 고소 운운하면서 합의금 지급을 요구하거나, 고가의 폰트 패키지를 구매할 것을 강요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의사소통의 수단인 ‘글자는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법원은 산돌체 등 일련의 서체 모음에 대한 저작물 등록 신청을 반려한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처분이 적법하다고 하면서, 위 글꼴들이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여야 할 문자인 한글 자모의 모양을 기본으로 삼아 실용적인 기능을 주된 목적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 자체가 실용적인 기능과 별도로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적 특성이나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창작물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어서 저작권법의 보호대상이 아니라고 판시한 바 있다(대법원 1996. 8. 23. 선고 94누5632 판결). 응용미술저작물에 관한 이른바 분리가능성 이론을 적용하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글자의 공공재로서의 성격까지 고려하여 고도의 창작성을 요구한 취지로 보인다. 이처럼 엄격한 기준이라면, 실용성이 떨어질 정도로 장식적 요소가 많은 글꼴이나 전자적·기계적 조판과는 거리가 먼 서예 작품이 아닌 한 글꼴은 저작권으로 보호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꼴 파일에 대한 저작물성 인정권리자와 이용자 사이의 균형을 통하여 창작을 독려한다는 지식재산권의 이념을 고려하면, 법률가의 시각에서 이처럼 낮은 보호 수준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글꼴은 그 성격에 맞는 합당한 수준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일까? 언뜻 보기에는 별 차이 없어 보이는 글꼴이라도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 획이 차지하는 면적과 빈 공간이 차지하는 면적의 비율, 획과 획이 서로 맞닿는지 여부, 세리프의 크기와 각도, 기준선을 벗어나는 정도 등등이 모두 다르고,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어우러져 그 글꼴의 정체성을 만든다. 이러한 요소들을 두루 고려하여 큰 글자로 인쇄했을 때 미려하면서도 작은 글자로 긴글을 적었을 때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는 세련된 글꼴을 만드는 것은 오랜 기간 훈련을 거친 전문가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KS5601에 따라 2,350자를 한땀 한땀 그려야 하는 한글 글꼴 작업에 들어가는 노고를 생각하면, 그 보호에 관해서는 법률 어딘가에 ‘구멍’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구멍을 메우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판례는 글꼴 파일을 컴퓨터프로그램으로 보아 보호하고 있다(대법원 2001. 6. 29. 선고 99다23246 판결). 여기에서부터 ‘저작권은 아이디어가 아닌 표현을 보호한다’는 명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프로그램과는 달리, 컴퓨터에서 사용되는 글꼴 파일은 창작자가 도안한 글꼴의 윤곽선을 일련의 지시명령으로 자동적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복제는 실질적 유사성뿐만 아니라 의거성도 요건으로 하므로, 어떤 글꼴의 출력물을 그대로 따라 그린 다음 그 윤곽선을 글꼴 파일로 변환하더라도, 원래의 글꼴에 대한 복제권 침해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복제권 침해로 본다면, 결국 그 글꼴의 윤곽선 정보를 담고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글꼴의 윤곽선 도안 그 자체를 저작물로 인정하는 결과가 될 텐데, 이는 글꼴의 저작물성에 대한 확립된 대법원 판례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저작물로서의 보호에 관한 의문다른 방향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글꼴 도안의 저작물성에 대한 판례의 태도에 의하면, 활자를 그대로 본떠 새로운 활자를 만드는 것은 복제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디지털 시대에 글꼴 파일을 복제하는 행위와 다르게 평가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글꼴 파일을 제작함에 있어서 창작성이 있는 부분은 글꼴의 도안이고, 이를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파일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매우 기능적이고 기계적이다. 그런데도 저작권법이 글꼴의 도안은 보호하지 않고 프로그램으로서의 글꼴 파일을 보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은 프로그램의 저작물로서의 보호에 관한 의문으로 연결된다. 프로그램 저작권 침해에 관한 거의 모든 사례에서 유사도 감정은 문언적 요소, 즉 소스코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프로그램의 구조, 순서 및 조직(SSO: Structure, Sequence and Organization)과 같은 비문언적 요소가 저작권법으로 보호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으나, 실제 감정에서 그 유사도를 직접적으로 다룬 사례는 찾기 어렵다. 또한 소스코드의 길이가 아주 짧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창작성 유무가 다투어지는 사례도 매우 드물다.
저작권법의 법리에 맞추어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자면, 프로그램의 분량이 충분히 길고 유사도가 높은 경우 복제된 부분이 당연히 창작성이 있고 비문언적 요소도 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바라보면, 프로그램은 어쩌면 ‘이마의 땀’ 이론에 의해 보호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질적 유사성과 의거성이 인정되는 상황에서 피고가 ‘원고의 프로그램은 기능적이어서 창작성이 없다’고 항변한다면, ‘그럼 굳이 왜 원고의 프로그램을 베꼈나’라는 의문이 들 것이고, 그 대답은 아마도 ‘직접 소스코드를 작성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일 것이다. 즉, 프로그램 저작권의 보호는 적어도 실무적으로는 ‘다른 프로그램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특징’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데에 투입된 시간, 노력과 비용’에 중점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표현과 아이디어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것은 아마도 저작권법의 과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그러한 선을 꼭 그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글 _ 최정열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전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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