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극장 (1/3)
HOME 뒤로
검색 분류
블로그 전송 카페 전송 밴드 전송 카카오스토리 전송 페이스북전송 트위터전송
글씨도 저작권이 있다
글씨도 저작권이 있다
서예 캘리그래피를 BI로 무단 사용한 식당이 있다. 서예가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캘리그래피를 사용한 이 식당은 캘리그래피를 통해 이득을 본 것이 없다며 손해배상을 거부했다. 서예가의 독자적 사상과 감정이 담긴 이 글씨는 저작권법상 미술저작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있는 판단 근거를 명시한 판결이 나왔다.
유명 음식점의 미심쩍은 BI파워블로거 김수서는 최근 유명세인 불맛 짬뽕을 찾았다. 가게 내부를 둘러봤고 메뉴 구성과 시간대에 따른 손님 수와 주문 후 몇 분 만에 음식이 나오는지 시간을 체크했다. 맛집과 저작권 분야 전문 포스팅으로 꽤 유명한 블로거인 그는 이곳의 음식 맛과 서비스 등을 총체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꼼꼼하게 가게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런데 간판을 보고 뭔가 기시감을 느꼈다.
그 느낌은 냅킨에 인쇄된 문구와 메뉴판에서도 동일하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걸까 곰곰 생각에 잠기던 김수서는 불맛 짬뽕의 BI가 인쇄된 디자인의 ‘불맛’이라는 글씨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김수서는 급히 자신의 블로그 포스팅을 찾아봤다. 역시 자신의 느낌이 맞았다. ‘불맛 닭갈비’ 포스팅에서도 똑같은 ‘불맛’ 글씨를 찾은 것이다. 불을 형상화하여 서예로 멋들어지게 쓴 캘리그래피가 인상 깊어 높은 점수를 줬던 것이 블로그에 포스팅되어 있었다. 비슷한 것도 아니고 완벽하게 똑같은 디자인. 김수서는 이게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며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동일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하고 블로그의 저작권 페이지에 불맛 짬뽕과 불맛 닭갈비의 간판 사진을 나란히 올려 문제 제기를 했다.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유희원은 불맛 닭갈비로부터 항의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똑같은 글씨를 다른 곳에 써줄 수 있느냐는 내용의 항의였다. 유희원은 자신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고 착오가 있는 것 같으니 확인을 해보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뒤 김수서의 블로그에 들어가 문제의 포스팅을 확인했다. 유희원은 깜짝 놀랐다. 정말 자신이 쓴 캘리그래피가 난생 처음 본 짬뽕집 간판에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불맛 짬뽕이라는 곳은 자신에게 일을 의뢰한 적도 없고 불맛 닭갈비 집에 제공했던 캘리그래피를 사용하겠다고 연락도 하지 않고 허락도 받지 않았다.
그야말로 짬뽕집은 ‘불맛’이라는 서체를 무단으로 상호에 사용하고 있었다. 유희원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불맛 짬뽕 회사에 메일을 썼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꼼꼼히 내용을 확인한 뒤 마지막 문장을 조용히 읽어봤다.
“캘리그래피 ‘불맛’은 닭갈비 회사가 상호에 쓰기 위한 목적으로 발주, 저작권 등록을 마쳤습니다.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음을 명시한 제작의뢰서도 가지고 있으니 불맛짬뽕이라는 상호에 무단 도용한 것에 대해 손해배상을 해주십시오.”
유희원은 메일 전송 버튼을 눌렀다.

법이 지켜준 글씨의 창조성메일을 받은 불맛 짬뽕사 대표 강대구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예의를 갖춘 그러나 정확한 항의 내용이 담긴 메일은 저작권 등록증까지 첨부되어 있었지만, 강대구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메일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메일을 읽고 심각성을 인지해 걱정하거나 고민하는 얼굴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했지만 정작 강대구는 이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냐며 도리어 직원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직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대구는 유희원에게 짧은 답메일을 보냈다.
“그 ‘불맛’이라는 캘리그래피가 없어도 영업에 지장이 없습니다. 손님들에게 물어봤더니 그것 때문에 짬뽕 먹으러 오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글씨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락 없이 글씨를 사용한 것은 유감이지만 그것 때문에 이득을 본 게 없습니다.”
유희원은 강대구의 메일을 읽고 이 일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저작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글씨의 가치를 그 어떤 효과도 의미도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났다. 유희원은 그의 무례한 메일에 더 이상 답하지 않고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김수서는 법정에 앉아 판사가 내리는 선고를 들으며 노트에 내용을 기록했다. 김수서는 포스팅에서 제기한 ‘불맛’ 글씨 문제가 결국 소송까지 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각각의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조사하며 소송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저작권에 관심이 있었지만 서예를 저작물로 인정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고 자신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포스팅에 달린 댓글이나 몇몇 텍스트들에서 한 두글자쯤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번 소송에서 어느 정도 책임감도 느끼고 있었고 특별한 관심도 있었다.
무엇보다 김수서는 이 문제를 제기한 입장에서 결과까지 포스팅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기에 법정에서 내려지는 선고의 모든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기록으로 남겼다.
소송이 끝나고 김수서는 이 사건을 정리한 뒤 저작권 페이지에 내용을 정리해 포스팅했다. 특히 캘리그래피의 저작권과 손해배상책임의 범위를 정리할 때 주의를 기울였다.

1. 서예와 캘리그래피의 저작권을 인정할 수 있을까?어떤 이들은 단어나 문장 자체가 창작적이지 않기에 글씨나 캘리그래피에는 창작성이 나아가 저작권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이번 ‘불맛’ 글씨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사건과 소송 과정을 통해 살펴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서예가 유희원이 쓴 ‘불맛’은 작가의 역량이 담긴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한 결과물이다. 저작권법이 요구하는 창작성은 유희원이 붓을 잡고 글씨를 쓰는 과정 자체 혹은 붓으로 쓴 글씨 자체에 이미 나타난다고 봐야한다. 서예가의 독자적 사상 및 감정, 즉 창조적 개성이 표현된 글씨로서 저작권법상 미술저작물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캘리그래피를 대하는 사람은 선의 굵기나 형태, 운필의 방식 등을 통하여 특정한 인상이나 심미감을 감득할 수 있다. 이는 작성자의 창조적 개성이 표현된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것이다. 즉 ‘불맛’이라는 글씨는 유희원의 창조적 개성이 표현된 미술저작물이다. 비록 고도의 창작성이나 심미감을 갖고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경제적 활동 및 예술적 활동의 결과이고 법적 보호가치가 있다.
2. 서예와 캘리그래피 저작권을 침해할 경우 손해배상책임의 범위는?유희원은 ‘불맛’을 쓸 때 클라이언트인 ‘불맛 닭갈비’와 저작권 활용 범위를 구체적으로 논의했으며, 저작권 등록을 마쳤다. 이를 다른 기업인 강대구, 즉 ‘불맛 짬뽕’이 무단으로 활용한 것은 영리를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봐야 한다. 특히 강대구는 타인의 저작권을 보호하고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심지어 저작권 침해 사실을 유희원으로부터 알게 된 후에도 시정 조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법원은 유희원이 ‘불맛’을 쓰는데 기울인 노력, 난이도, 강대구의 침해 범위 및 기간 뿐 아니라 강대구의 태도 등을 고려하여 손해배상 금액을 인정하였다.

이 이야기는 서예가의 창조적 개성이 표현된 서예 캘리그래피를 사전 허락 없이 식당의 BI로 사용한 것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을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8. 4. 13. 선고 2017가단5055851 판결]
피고는 캘리그래피의 저작권법상 저작물성을 부인하면서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법원은 원고가 직접 붓을 들고 몇 차례의 습작 과정 속에서 완성한 글씨로 저작권법상 미술저작물에 해당하기 때문에 피고가 원고의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글 _ 정용준 소설가, 〈바벨〉,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가나〉 등 집필 그림 _ 이승정

TOP
구독하기
top top
지난호 보기

X
검색하기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