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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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내 삶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저작권 관련 글을 한편 써달라는데
나는 누구의 삶을 팔아 그동안 얼마를 챙긴 것일까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 온
아내의 저작권은 몇 퍼센트일까

신인 때는 고료마저도 사치
청탁 한번 더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어느덧 나는 자꾸 비굴한 노년을 위해
넉넉한 생활을 위해
짭짤한 저작권을 꿈꾸지는 않는가

'그'를 저작권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가
누군가의 비참과 울분을
확실한 저작권의 계기로 상상하지는 않았는가
내가 왜 저 꽃의 저작권을 탐해야 하는지
내가 왜 저 흙의 저작권을 탐해야 하는지

내 삶의 저작권도
실상은 내게 있지 않다.

- 「저작권」 전문,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 수록

가끔 저작권료를 받으며 괜스레 미안해지곤 했다. 농부가 자신이 지은 농산물의 대가를 받듯, 또는 어부가 저 먼 바다에서 어획해 온 해산물의 대가를 받듯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왠지 꺼림칙해지곤 했다. 가끔은 남의 삶을 빌어 내가 혜택을 입는 나쁜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실상 '내 삶의 저작권’도 내 것만이 아니다. 태어나 성년이 될 때까지 부모님들 수고에 기대 나라는 삶의 윤곽이 잡혔다. 학교에서는 큰 대가없이 내가 인류의 지적재산에 접속할 수 있게 해주었고, 자연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는 바 없이 내게 비와 바람과 번개와 천둥과 노을과 낮과 밤과 눈과 안개와 강과 바다와 산과 수많은 나무들과 풀들과 꽃들에게 세상을 사숙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더불어 살아왔던 친구들, 연인들, 동료들, 이웃들, 동지들은 내게 우정과 사랑, 존중과 연대, 협동, 우애 등 인간이 살아가면서 꼭 배워야 할 관계론을 전수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어떤 이의 슬픔과 고통에 기대 나는 인간으로서 꼭 해야 할 말들을 얻기도 했고, 때론 어떤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 기억되어야 할 이야기 몇 편을 얻기도 했다. 내 몸마저도 타인의 수고와 노동에 기대 살아가고 있다. 오늘 아침 먹은 고등어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어떤 이는 밤새 검은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올렸을 수 있고, 내가 오늘 점심 때 맛있게 먹은 시금치를 기르기 위해 어떤 할머니의 허리가 밭고랑에서 녹슨 허리처럼 더 굽었을 수도 있다. 저작권과 관련한 글을 쓰고 있는 이 책상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벌목공은 발목을 삐었을 수 있고, 어떤 목수는 잘못 내리친 망치질에 손톱에 검은 멍이 들었을 수 있고, 어떤 철공은 손등을 데었을 수도 있다. 눈앞의 컴퓨터 메모리를 아무런 보호 장구없이 유독성 유기용제에 세척하다 제3세계 외주하청공장의 어느 여성노동자가 다시 눈이 멀거나, 백혈병에 걸렸을 수도 있다.

내 시 한 편은 그런 삶의 유기적 경험과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내가 청계천 8가에서 리어카 가득 원단을 실고 가는 한 늙은 노동자를 우연히 만나고, 그의 검은 얼굴 깊은 주름에 빠져 걸음을 떼지 못할 때, 내가 영등포로터리 뒷골목 어느 철공장에서 쉬지 않고 절곡을 하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 아파트 길변에 상보만한 보자기를 펼치고 거기에 정성스레 다듬어 온 손바닥만한 나물이나 채소 조금을 놓고 종일 시든 채 앉아 있는 할머니 앞에서 걸음을 못 뗄 때, 그런 삶의 공교로움과 낮음과 고단함에 대해 글을 받아 적을 때 나는 그들의 전생의 힘겨움을 채 1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함부로 빌리고 함부로 해석하고 함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값싼 잠깐의 우수와 측은지심을 위해 그 누구의 삶도 함부로 기록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나라는 저작권이 형성되기까지 내가 받았던 이 무수한 연대의 삶과 관계에 대해 늘 겸손하고, 겸허해야 한다는 짧은 생각. 어줍잖은 내 삶의 저작권이 존중받고 인정되듯이 모든 이들의 삶의 저작권이 존중받고 인정받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인간의 저작권만이 아니라 저 수십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우리에게 빛과 온도를 전해주고 있는 저 태양의 저작권도, 저 달빛의 저작권도, 저 바람과 강물과 나뭇잎들의 저작권도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 모든 유기체들의 조화와 수고가 존중받으면서 공존하고 지속가능한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어쩌면 저작권 관련해 이렇게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 얘기도 철늦은 허영이거나 한없이 순진한 행태인지도 모른다. 오늘 우연히 뉴스 하나를 봤는데 600여 개 직업군 연평균 소득을 조사해봤더니 문학인들이 맨 꼴찌라고 한다. 연 소득 540만 원 선이었다. 교수 등 소수의 안정적 직업을 가진 이들 외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지적 정신적 양식’을 생산하는 대다수 문화예술인들과 인문학 종사들의 처지가 비슷했다. 현대 재화 생산의 맨 밑바닥에 있는 재재하청 노동자들의 처지보다 더 못한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노동자에 다름 아니다. 무수한 저작권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소수의 문화-콘텐츠 산업이나 기업들일 뿐이다. 모두를 돈의 노예로, 알량한 소유권의 노예로 만들되 대다수의 사람들을 한없이 가난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요술. 자꾸 저작권이라는 개념과 그 뿌리와 적용 범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은 까닭이다. 저작권이 혹 잘못된 소유권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 세부나 장식물 정도로 기능하지 않게, 저작권이라는 달콤함이 소수의 저작권 수혜자들의 사회적 무책임함과 안일함과 체재내화에 기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관한 우려를 담아 앞의 시 ‘저작권’을 써보았다. 과거 무수한 위대한 작가들이 받았던 것은 당대의 인정과 윤택과 과실이 아니라 다른 꿈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기성체재로부터의 냉대와 외면과 배제와 은폐와 멸시와 탄압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고통의 저작권을, 저항권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어떤 삶의 저작으로 나와 우리가 남아야 할까. 오늘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게 아름다운 일일까. 아니면 오늘 다시 시대의 이단아로, 불온아로, 반항아로 소수화되는 길이 아름다운 일일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는 오늘이다.


글 _ 송경동 시인, 시집 『꿀잠』(삶창, 2006),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창비, 2009),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창비, 2016),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실천문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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