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극장
HOME 뒤로
검색 분류
블로그 전송 카페 전송 밴드 전송 카카오스토리 전송 페이스북전송 트위터전송
절반의 무죄
절반의 무죄
‘표지갈이’로 저작권을 침해한 책이 있다. 실제로 책을 저술하지 않은 사람을 저작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실제로 출간하지 않고, 압류되기 전까지 창고에 보관하기만 한 상황이라면 저작권 침해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독자를 만나는 꿈이제 막 완성된 책의 형태를 갖춘 북스는 어두운 창고에서 서서히 눈을 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종이 냄새 가득한 서늘한 창고.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고요히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수많은 친구 책들. 그들은 저마다 만나게 될 독자들을 상상하며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북스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힘 있고 단정한 필체로 인쇄되어 있는 제목과 단단한 표지. 의미 있는 사유와 지식이 가득 담긴 두꺼운 책장. 표지와 날개에는 국립대학교 소속의 유명한 교수들의 이름이 저자로 적혀 있었다. 세상에 많은 책이 있지만 북스는 자신이 그런 의미 있는 책으로 탄생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하루빨리 저 문이 열리고 세상에 나가 독자들을 만나길 꿈꿨다.
문이 열렸다. 드디어 그 날이 온 것인가. 북스는 두근두근 떨리는 심정으로 서점과 도서관을 향해 출발할 준비를 했다. 바다 위를 떠도는 병 속의 편지처럼 유통의 바다 위를 흘러 흘러 의미있는 독자를 만나기를. 눈 밝은 이들의 눈 속에 담겨 훌륭한 사유와 유익한 지식의 원천이 되기를 꿈꿨다. 그러나 북스의 기대는 무너졌다. 창고에 들어온 사람들은 검찰이었다. 북스와 친구들은 압수 박스에 차곡차곡 담겨 봉해졌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북스는 자신을 닮은 친구들과 켜켜이 쌓여 실망과 슬픔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북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근엄한 복장의 엄격한 두 명의 판사들이 자신과 자신을 닮은 초판본을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북스는 처음엔 무슨 상황인지 인지할 수 없어 두려움에 떨었지만, 판사들이 나누는 대화와 주변 환경이 조금씩 파악되면서 자신이 어디에 무슨 이유로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곳은 법정이고 자신은 판사의 손에 들려있는 증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졌다. 북스는 판사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판사들의 판결에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중하게 만들어진 책으로서 독자에게 닿을 수 없다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너무 허무할 것 같았다. 북스는 문제점을 하나둘 인지하기 시작했다. 일단 공저자의 이름이 정확하지 않았다. 판사들의 의견이 맞는지 북스는 눈을 감고 마음속을 헤아려봤다. 그렇다. 자신을 직접 쓰지 않았던 교수들의 이름이 공저자로 올라가 있었다. 소위 말해 표지갈이를 한 것이다. 몇몇 저자가 공저자가 아니면서도 표지에 이름을 공저자로 추가했다. 명백한 위법이었다. 그러나 북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다. 발간한 표지갈이 책 가운데 일부가 인쇄된 뒤 창고에 입고된 직후 검찰에게 압수당해 시중에 출고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북스는 떨리는 마음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판사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절반의 무죄
점 하나의 의미김부건 판사가 코끝에 걸친 안경을 손으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함께 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이숙희 판사에게 말했다.
“피고인들, 즉 저작자가 아님에도 공저자로 이름 올린 교수들이 개정판을 발행할 당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진술은 신빙성이 있네요.”
그는 북스의 표지와 내용물을 주의 깊게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이 책은 출판사 직원들이 피고인들과 무관하게 발행한 개정판으로 보이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북스는 또 다른 판사 이숙희가 어떤 말을 하는지 듣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이숙희는 입술을 꾹 다물며 자료를 살펴본 뒤에 말했다.
“저작권법 제137조 제1항 제1호를 살펴보면 ‘저작자 아닌 자를 저작자로 하여 실명·이명을 표시하여 저작물을 공표한 자를 형사처벌한다’고 했으니….”
개정된 저작권법의 해석을 어떻게 할지가 중요한데, 김부건 판사는 볼펜 끝을 앞니로 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북스는 판사들의 말 한마디와 해석에 따라 달라질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숨죽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작권법 제2조 제25호는 ‘공표’를 ‘저작물의 공연, 공중송신 또는 전시 그 밖의 방법으로 공중에 공개하는 것과 저작물을 발행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어요. 구 저작권법은 ‘발행이라 함은 저작물을 복제하여 발매 또는 배포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했지만, 개정된 저작권법은 ‘발매 또는 배포’라는 표현 대신 ‘복제·배포’라는 표현을 썼어요.”
이숙희 판사는 그 부분에서 말을 받았다.
“제 생각도 가운뎃점의 해석이 중요할 것 같은데요. 일반적으로 ‘와/과’의 의미가 있는 문장부호거든요. 그렇다면 ‘복제·배포’는 복제하여 배포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봐야 해요.”
“복제하여 발매 또는 배포한다는 기존의 문장과는 확실히 다르네요.”
“그렇죠. 기존에는 복제든 발매든 다 문제가 되지만 바뀐 법은 복제하고 발매했을 경우라고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완전히 문제가 된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네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안 된다고 볼 수도 없으니 좀 난감합니다.”
“음…….” 김부건 판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복제·배포의 의미를 엄격하게 해석하면 결국 저작물을 ‘복제하여 배포하는 행위’가 있어야 저작물의 ‘발행’이라고 볼 수 있고 저작물을 ‘복제’한 것만으로는 저작물의 ‘발행’이라고 볼 수 없겠어요. 그리고 원칙상 벌을 주는 법규는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확장 또는 유추해석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봐야겠네요.”
판사들은 오랜 논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복제는 하였으나, 창고에 보관하여 배포되지 못했던 책을 저작물의 발행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을 저작권법을 위반한 ‘공표’ 행위가 있다고 보기 어려워 본 사건을 기각하기로 한다.”
북스는 판사들의 결정을 듣고 안도했다. 하지만 저작권법을 위반한 행위로 인해 자신의 운명이 책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표지갈이는 분명히 잘못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북스는 다시 증거물 봉투에 들어가 압수된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북스는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책들에게 이 같은 사항을 설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문제를 겪지 않도록 저자들과 책을 만드는 모든 이가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절반의 무죄
이 이야기는 인쇄한 후 출판사 창고에 보관 중이던 일명 ‘표지갈이’ 책이 검찰로부터 압수당하여 시중에 출고되기 전 상황을 두고 저작권법의 공표와 발행에 대한 법리를 판결한 내용입니다. [대법원 2018. 1. 24.선고 2017도18230 판결]
법원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상 형벌법규는 문언에 따라 해석·적용하여야 하고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확장해석하거나 유추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견지에서 ‘복제·배포’의 의미를 엄격하게 해석하여야 하며, 저작물을 복제하는 것만으로는 저작물의 발행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글 _ 정용준 소설가, 〈바벨〉,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가나〉 등 집필
그림 _ 이승정


TOP
구독하기
top top
지난호 보기

X
검색하기

X